어린 시절 50원짜리 하나만 있어도 달려갔던 오락실.
국민학교 3학년 때 엄마한테 혼난 이후엔 중학생이 될 때까지 출입을 끊었던 곳이지만 화면 가득 펼쳐지는 8비트 게임들의 향연은 어린 소년의 오감을 훔치기에 충분한 것이었는데요.
주먹왕 랄프(Wreck-It Ralph)라는 작품을 보고 있으니 그 시절의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르더군요. 이 작품은 오락실 혹은 아케이드 게임장이라고 부는 곳을 배경으로 하는 탓에 당연하다는 듯 팩맨이나 소닉, 마리오, 스트리트 파이터 캐릭터들이 우정 출연을 하고 있거든요.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장난감 가게의 밤이라는 설정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잠드는 밤이 되면 장난감 가게를 가득 채운 장난감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말을 하고 이야기한다는 상상을 장난감 가게에서 오락실로 옮겨놨다고 할까요?
오락실 기계에 코인이 하나 들어올 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프로그램대로 건물을 파괴해야 하는 악당, 랄프. 덕분에 맡은 바 일에 충실함에도 늘 그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성격도 따뜻한 전형적인 주인공 캐릭터지만 대신 같은 게임에서 활약하는 랄프가 부순 집을 고쳐주는 주인공, 펠릭스가 모두의 사랑을 받죠.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악당의 운명.
어느 날 그런 악당 생활에 염증을 느낀 랄프가 자신도 펠릭스처럼 빛나는 메달을 따서 게임 속 존재들에게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좀 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절치부심하게 되는데요. 메달을 따기 위한 랄프의 좌충우돌이 작품의 시작이죠. 메달 획득에 혈안이 되어 여기저기 게임을 옮겨 다니며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랄프와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요.
슈가 러쉬, 히어로 듀티, 다고쳐 펠릭스...
같은 어딘가 있을 것 같기도 없을 것 같기도 한 게임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투박한 2D 게임 세상을 깔끔한 3D 그래픽으로 제법 잘 표현하고 있고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악당 랄프의 자아 성찰과 그와 맞물린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해피 엔딩으로 향하는 유쾌한 향연을 보여주는데요. 어린 시절의 상상을 천연덕스럽게 보여주는 영상 덕분에 우리가 보는 곳의 이면에서 혹시? 라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던 작품이더군요.
한 가지 더 눈에 띈 건 개그맨 정준하의 목소리 연기인데요.
주먹왕 랄프를 연기한 정준하의 존재는 그의 인기에 기대 영화 흥행을 바랐을 국내 유통사의 빤한 바람이 읽히는 코드였지만 정준하 특유의 따스함이나 묵직한 중량감이 잘 얹혀져 꽤 호연이었다고 평해주고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개그맨이나 아이돌의 목소리 출연 자체를 마뜩잖게 보는 편이지만 정준하의 연기는 성우들의 농익은 연기와는 또 다른 풋풋함으로 랄프라는 캐릭터가 가진 감정 처리나 표현을 제법 잘 하고 있더라고요. 한덩치하는 영화 속 랄프와 정준하의 캐릭터가 완벽히(?) 오버랩된 덕분이긴 하겠지만, 이미지 캐스팅도 이 정도면 성공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눈높이가 낮은 작품답게 익숙한 설정과 평이한 반전이 이어지는 100여 분짜리 애니메이션 한편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랄프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조금씩 이해하면서 자신의 몫을 다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어떻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걷는다는 게 어떤 건지를 몸소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녀들과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좋은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디즈니의 작품 아니랄까 봐 웃음과 교육적인 메시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무난하게 잘 잡아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은근 사랑스러운 랄프와 깜찍한 바넬로피의 활약을 보는 것만으로 자녀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 추억의 게임 속 캐릭터들의 든든한 카메오 출연이 제겐 더 와 닿았지만요.^^
평범한 이야기를 뒤집는 깜찍한 반전의 영화, 주먹왕 랄프.
정준하 버전으로 보셔도 나쁘지 않으실 겁니다. 가정의 달 추천 작품으로 슬쩍 밀어 넣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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